[BIFAN 25주년 기념 연재]BIFAN의 추억(1)

'25년 역사의 영화제'로 부천시민은 행복한가?

구자룡 편집 주간(시인) | 기사입력 2021/05/24 [07:18]

[BIFAN 25주년 기념 연재]BIFAN의 추억(1)

'25년 역사의 영화제'로 부천시민은 행복한가?

구자룡 편집 주간(시인) | 입력 : 2021/05/24 [07:18]

정학을 무릎 쓰고 영화관 전전

 

학창시절, 필자는 영화 보기를 좋아했다. 책 읽는 것 외에 별 놀이가 없었던 시절이기에 영화 감상은 유일한 즐거움이자 취미생활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황혼의 블루스’에 접어든 실버세대는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화는 ‘학생 입장 가(可)보다는 불가(不可)’가 더 많았다. 그래서 학생 신분으로 몰래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들키면 정학(停學) 처분 등의 제법 수위 높은 처벌을 받았다. 그래도 나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관을 전전했다. 

 

필자가 거주하던 영등포에는 한꺼번에 2편을 동시 상영하는 3류 극장이 많았다. 명보극장, 연흥극장, 상의용사회관, 남도극장 등 이런 곳을 동시 상영관이라 불렀다. 오전 11시, 1회 상영시간에 들어가면 오후 서너 시 경에 영화관을 나온다. 동시상영을 두 번 보기 때문이다. 외국영화일 경우는 하루종일 극장 안에서 살았다. 비 내리는 자막을 눈이 나쁜 관계로 두 번을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물론 결석을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땡땡이‘를 친다.(그 시절에는 ‘땡땡이 깐다’고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그럴듯하게 핑계를 대면 선생님은 속아 넘어갔다. 통신수단이 없었던 시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아시면서도 모른 척 한 때가 더 많은 것 같았다. 특히 고3 때 선생님이 그랬다. 이렇듯 학창시절, 나는 불량 청소년이었다. 

 

영화배우 강수연이 표지 모델인 <부천문단> 10집

 

▲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보대사인 Bifan Lady 강수연 씨가 표지모델을 맡은 <부천문단> 10집 표지     ©부천시민신문

그 후 대학에 입학을 하고, “시를 씁네”하며 술 퍼 마시느라 바빴고, 졸업을 하고는 신문사에 취직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느라고 영화를 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는 결혼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낳고 살다 보니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영화관을 찾아가기는 했지만 영화와 나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1970년 이후 삶의 둥우리를 복사골 부천으로 틀었다. 낮에는 시골 소녀들과 함께 시를 노래하고, 저녁이면 뜻있는 문우들과 함께 복사골문학회를 만들어 소주잔을 기울이며 거리의 포장마차 순회를 하며 깊은 고뇌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1997년 부천시에서 영화제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문화의 불모지에서 영화제, 그것도 ‘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한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우선, 내가 관여하고 있던 복사골문학회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 <부천문단> 10호를 영화제 특집 기념호로 장장 1000쪽에 이르는 책으로 편집, 발행했다. 

 

‘복사골에 피는 영화 매니아의 꽃’을 특집 주제로 ▲문학평론가 김봉군의 ‘어떤 영화가 관객을 사로잡는가?’ ▲문학평론가 김경림의 ‘한국 문학 속의 한국영화’ ▲영화평론가 안정숙의 ‘일본 영화의 시민운동 ▲영화 매니아 이원철의 한국영화 감상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추억 ▲서양화가 이상덕은 한때 영화에 미처 관계했다는 김승호 출연의 <육체의 길>과 <경부선>의 이야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진작가 장경내의 ‘영화 매니아의 한’ ▲영화평론가 이명인의 ‘시간은 오래 지속 된다’, 그리고 유일한 부천 출신 영화배우 겸 연극배우 ‘이주실의 연기 세계’ 등을 다루었다.

 

이름 없는 한 지방 문학회에서 발간한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특집호는 문학 잡지 표지에 웬 여배우냐며 전국을 강타했고, 영화제로 인해 부천의 문화예술의 발전은 급성장을 했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민선 제1기 이해선 부천시장이었다.

 

8일간의 영화 여행 

 

▲ 영화 <마부> 포스터  © 부천시민신문

부천영화제는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기도 했다. 개막식 날 화려한 레드카펫을 밟는 것보다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든 일은 다름 아닌 영화제 기간 중(1998년 8월 29일~9월 5일)에 흘러간 옛날 한국영화를 상영했던 일이다. 그것도 1950년에서 1960년대 사이의 영화였다. 내가 학창시절 정학을 무릅쓰고 보았던 바로 그런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김희갑·구봉서 등이 출연한 <오부자>, 김승호·백설희 등이 출연한 <딸 칠형제>, 황해·이경희 출연의 <울지 마라 두 남매>, 김승호가 출연해 한국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마부>, 엄앵란과 신성일이 출연한 <로맨스 빠빠> 등 주옥같은 한국영화가 상영되었다. 비록 25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998년 당시에는 영화제 초청작품은 부천시민회관에서 상영을 했지만, 중장년층을 위한 추억의 한국영화는 지금의 소사어울마당, 즉 옛날 소사구청 소향관에서 상영을 했다.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저녁 무렵, 영화 보기에는 참 좋은 날씨라 관객들이 연일 대 성황을 이루었다.

 

“스물다섯 살의 영화제, 이제는 변화가 필요해”

 

▲ 1회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영화배우 최은희 씨, 신상옥 감독, 이해선 시장(오른쪽)이 리셉션 장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 구자룡 제공

 

부천문화예술의 혁명을 일으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회제가 올해 25살이 되었다. 그런데 4반 세기가 된 영화제가 아직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영화제 관계자들은 해마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보고서를 내놓고 있지만  부천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영화제 개최 기간에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  

 

매회 입장권은 매진이라는데 영화관에는 왜 관객이 없을까? 부천의 인구가 약 83만 명이라고 한다. 부천시민 10%만 참여해도 8만 3천여 명인데 말이다. 지난해 갑자기 발발한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영화 기간 중 부천 거리가 들썩거려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거리는 왜 썰렁할까? 적어도 영화제라면 관객이 모여야 하고 좀 북적거려야 한다. 

 

부천영화제보다 반년 앞서 막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 3년 늦게 시작한 전주국제영화제는 20회를 넘기면서 분명한 정체성과 지역문화가 어우러지면서 국제영화제로서의 자기 모습을 확고하게 각인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부천영화제는 국제적 명성과 달리 내면적으로는 아직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영화제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부족해 지역경제 활성화 및 부천을 찾은 관객들이 지역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부족한 실정이다. 여기에 ‘전주 시민과 함께하는 영화제’를 표방하며 ‘전주시민 대상 사전 예매제 도입’ 등 시민 참여를 적극 모색하고 있는 전주영화제와 달리 부천은 후원회 활동 외에 이렇다 할 시민 참여 방안이 없어 시민과도 점차 괴리되어가는 양상이다. 이런 양상은 특히 코로나19 이후 더욱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수렁에서 벗어나 초창기 때의 모습을 빨리 회복해야 할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것이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대중성이 있어야 한다. 그 대중성 때문에 관객이 몰리고, 몰린 그 관객이 주머니를 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제로 돈을 벌자는 뜻은 아니다. 수억의 부천시민의 혈세로 마련된 행사라면 적어도 부천 시민은 행복해야 되지 않을까? 차라리 영화제를 집어치우고 그 예산으로 ‘코로나19’로 허덕이는 영세민을 도와주는 편이 좋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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