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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약전
기사입력  2010/03/27 [19:16]   박정치 부천광복회장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는 안중근 의사이다. 안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고 고려조 명유 문성공 안향의 26대 손이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 조씨의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조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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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는 안중근 의사이다.

안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고 고려조 명유 문성공 안향의 26대 손이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 조씨의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조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공으로 덕망이 칭송되던 분이다.

안 의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검은 점이 7개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불렀고, 망명 후 구국 활동 때 이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안 의사는 나이 16세 때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으로 이사해 산수풍경이 가려한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성장했다. 일찍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과 통감에 통달, 문사의 앞날을 기약하였다. 그는 또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상을 높였다. 1894년 안 의사의 나이 16세 때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 무리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안 의사는 부친이 모집한 장병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용전하였다.

그해 김흥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다. 그 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을 '도마(Thomas)'라고 했으며, 조셉 빌렘(洪錫九) 신부에게서 불어를 배우고 서구의 새로운 지식도 넓혔다. 또한 빌렘 신부를 따라 선교활동에도 힘썼다.

그후 10년이 지나 1905년 안 의사의 나이 27세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며 구국 방도를 찾고자 상해로 갔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가산을 기울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구국영재 양성에 전력을 쏟았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보상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나라는 더욱 기울어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의 참상까지 목도하게 되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간직한 29세의 안 의사는 최후의 구국결의를 다지며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에 나아가 국외에서의 의병대열에 참여하였다.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의 직함을 띠고서 무장항일 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80년 7월에는 의병 3백여 명을 인솔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육진지역에 진군, 경흥 등지에서 일 군경과 교전, 몇차례 승첩을 올렸다. 그러나 회령 영산의 내회전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퇴, 12일 동안 겨우 두끼를 먹으면서 두만강을 건너 의병 본영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초봄 한인이 '연추'라고 부르는 연해주 크라스노키 하리마을에서 조국독립을 위한 결사동지들과 단지동맹을 하여 '동의단지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안의사를 비롯해 김기룡, 백규삼, 강창두, 조응순, 황병길,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각기 한칼로 잘라내어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고 조국독립에 헌신하기로 혈맹한 것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않아 안 의사는 이등박문이 러시아의 대장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논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호기로 판단, 우덕순 동지와 함께 하얼빈에 나아갔다.

마침내 역사적인 의거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 역두에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멎었다.

이토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하차해 군악을 울리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이 때 안 의사는 러시아 의장대의 뒤에서 의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안 의사는 이토가 10보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전광석화와 같이 권총을 꺼내 이등을 향해 연발의 탄을 쏘았다.

첫발이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제2발도 그의 흉부를 맞혔다. 또한 제3발도 그의 복부를 관통시켜 이등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안 의사는 순식간에 침략자의 응징장으로 변한 현장에 이등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대한국 만세'를 3번 외치고 태연자약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포박되었다가 곧 일제 관헌에게 넘겨졌다.

안 의사는 재판에서 "나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이고 특파독립대 대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의 괴수 이등박문을 총살, 응징한 것이다" 라고 밝혔다.

안 의사의 이 의거는 온 겨레는 물론 중국인민들도 기뻐해 마지않았다. 그보다도 안 의사의 이 의거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비롯해 동양평화 파괴의 괴수를 단죄 응징한 것으로 한국근대사에서는 물론 한.중.일.러를 포함하는 동양근대사에서 중요한
▲ 안중근 의사의 가족 사진(부인과 아이들)     ©부천시민신문
대목이 된다.

안 의사는 여순재판에서 이토의 죄상을 15가지 조목을 들어 낱낱이 단죄하고 침울한 감방에서 '안응칠 역사'라고 표제한 자서전을 기술해 자신의 떳떳한 행적과 이등 총살 의거의 뜻을 밝혔다.

이어 일인의 위약으로 미완인 채 끝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안 의사는 감방에서 그의 높은 기품을 담은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와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등을 비롯한 수십 편의 신품과 같은 유묵을 썼다.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1910년 2월 14일 겨우 6회 개정으로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게도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거 후 5개월에 걸쳐 여순감방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늠름하기만 하던 안 의사는 2천만 동포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기고 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여순 형장에서 조용히 순국하니, 때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이고 향년 32세이다. 비록 육신의 일생은 그리 길지 못하였으나 숭고한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의 혈육으로는 장녀 안현생(安賢生)과 맏아들 분도, 둘째아들 준생(俊生, 마태오)이 있었지만 맏아들 분도는 이듬해인 1911년 일제의 밀정에 의해 독살 당했다.  

*이 글은 2010년 3월 36일 부천시에서 개최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에서 광복회 부천지부 박정치 회장이 낭독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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